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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이야기/아이스하키

2011 세계아이스하키 U18 Div1 선수권대회에 다녀와서(1)


'첵!!' '체인지!!' 라는 감독과 코치의 고함이 오가고, 묵직한 퍽이 '퍽'하고 펜스에 부딪히고, '촤악촤악!!'하고 스케이트날이 얼음판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벤치의 선수들과 심판, 응원석의 관중들의 시선이 모두 170g의 퍽을 쫓지만, 나는 가슴을 졸이며 선수들의 모습과 표정을 살핀다. 언제 갑자기 발생할지 모르는 응급상황을 혹여 놓칠 새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자식의 뛰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이럴까. 어깨 부상이 있는 선수가 부득이 아픈 쪽으로 상대의 체킹을 받아내야 할 때는, 벤치로 들어오자마자 아이스팩을 올려주려 준비하는 내 어깨도 바늘로 찌르듯 아파온다. 이곳은 아이스하키 U18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슬로베니아이고, 나는 한의사다.

해외에서 꼬박 한 달을 한곳에서 지내는 경험은 어떤 연유로든 흔한 기회가 아니다. 슬로베니아는 두 번에 나눠서 정확히 한 달을 머무른 장기 체류 도시가 되었다. 2009년 3월에 지금처럼 18세 아이스하키대표팀에 팀닥터로 출장하여 Division2에서 5전 전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따냈던 곳이다. 2년 후 2011년 4월, 2주 동안 다시 찾은 마리보는 경기 성적을 떠나 나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Maribor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강,  Slovenja)

발칸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1991년 내전을 거쳐 유고연방에서 분리, 일찍 자본주의경제로 전환하여 동유럽권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이다. 인구는 고작 200만이지만 체감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높고, 장점이라면 알프스 끝자락의 멋진 경관을 자랑한다는 것. 시합 링크장이 있는 Maribor라는 도시는 체류기간 내내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을 만나기 힘든 곳이다.

아이스하키는 챔피온쉽에 18개국, Division1에 12개국, 그 아래로도 Division2, 3, 4 등으로 랭킹이 정해지는데, 한국은 시니어랭킹으로는 33위, 18세 주니어팀은 최근에 Division1과 2를 오가고 있다. 이웃 일본은 아이스하키가 한국보다 훨씬 앞서고 Division1에 일찍부터 자리를 굳혀오고, 아시아권에서는 러시아 영향으로 카자흐스탄이 특히 여자아이스하키에서 강국으로 꼽히고 있다.

작년 덴마크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승을 거둬 Division1에 잔류를 성공하였지만, 올해는 홈팀 슬로베니아에게 패하면서 2년 전의 승리를 재현해 내지 못하고 말았다. 경기 마지막 날 슬로베니아 경우는 골키퍼까지 세 명의 주전선수가 어깨부상으로 삼각건을 맨 채 동메달을 받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해 볼만 한 승부였는데 하는 아쉬움과 동시에, 우리 팀에서 저 지경까지 부상이 많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숙소의 의무실이나 링크장 대기실에서야 침, 추나, 테이핑을 시술하지만 시합장에서는 파스, 냉각제, 아이스 팩 만 쓸 수밖에 없다. 당장 진통제를 쓸 수 없는 급한 두통에는 간단한 침치료로 도울 수 있고 마사지와 별개로 추나요법과 수기법은 선수들 전원이 시술받다시피 한다. 이렇게 치료 받던 선수가 귀국 후에 다시 한의원을 찾아오면 그 반가움과 고마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왼쪽 무릎 바깥의 만성 통증과 염발음을 호소하여 이학적 검사 상 근육 불균형에 의한 장경인대의 과긴장을 확인하고 해당 부위의 침치료와 테이핑을 3회 시술하고 자가 스트레칭 지도만으로 호전을 보았다. 스케이팅을 많이 타는 선수들은 사이클 선수 못지않은 허벅지 둘레를 자랑하는데, 오히려 대퇴부 근육 불균형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프랑스전에서의 대표팀 GK 정구진 선수)

아이스하키 골키퍼는 정강이 내측을 바닥에 반복해 찧게 하는 외반자세로(valgus) 수비를 많이 하게 되는데, 이는 내측인대의 지속적인 자극과 손상을 가한다. 역시 테이핑과 침치료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운동을 지속하는 한 반복되는 기계적 자극을 피할 방법은 없다. 결국 스포츠손상은 과사용증후군으로, 흔히 말하는 직업병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개개인의 직업병을 치료하러 온 것이 아닌 이상, 대표팀 팀닥터는 ‘선수의 손상을 낫게 하는’ 목적의 치료사가 아니라 ‘선수가 다음 경기를 뛸 수 있게 만드는’ 메딕(모 전쟁 게임에 등장하는) 역할에 가깝다고 본다. 개개인의 치료는 결국 귀국하고 나서의 몫일지도 모른다.

(괜찮아.. 힘내.. 이번 시즌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

(락커룸 앞에 붙은Team KOREA)

이번 여정을 위해 몇 개월 간 학원을 다니며 속성으로 영어회화를 준비했다. 보통 대표팀 출국에는 협회 소속의 통역이 따라붙지만, 매번 함께 있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역의 공백 시에는 가방끈 길다는 명목으로 팀닥터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더군다나 팀닥터가 참여하는 메디컬 미팅이나 룰 미팅에서는 공용어인 영어를 듣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칫 외국 의료진과의 첫 만남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끔뻑이다 마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팀닥터는 스포츠 뿐 아니라 민간외교사절단 아닌가. 내 딴에는 나름의 준비 덕분인지 투자한 시간과 돈 이상으로 많은 보탬이 되었다. 2년 전 대표팀 현지 가이드를 했던 Nina라는 여성이 내 메일을 받고 Ljubljana(류블랴나, 슬로베니아의 수도)에서 대한민국 팀을 응원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는데, 잠깐이었지만 오히려 2년 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국외 팀닥터 활동 또는 더 큰 포부의 무엇을 생각하는 후배님들께서는 부디 영어를 가까이 하시길 권한다.

(IRS: Injury Report System, IIHF)

아이스하키 국제시합에서 시합 중 부상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양식이 있다. 당연히 해당국가의 팀닥터가 기록하고 영어로 쓰여 있으며, 의학용어를 사용한다. 두부손상에 대한 기록을 채우려면 양식에 기재된 Glasgow Coma Scale(글라스고 혼수 척도)와 같은 재활의학 또는 응급의학 내용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현대의학의 용어들 역시 ‘함께 통용되는’, 팀닥터의 공용어이기 때문에 몰라서는 혼자 딴 소리 할 수 밖에 없다. 작년 덴마크에서 링크장 안의 응급처치실 벽면에 근막통증후군(MPS)의 부위별 연관통을 그려놓은 포스터가 붙어 있던 걸 본 기억이 난다. 한의학의 경락도가 세계에 보편화 되어 먼 나라의 의료시설에서도 발견되려면 어떤 노력을 하는 걸까 고민해 보았다.

한창 프로 야구의 시즌이다. 8월에는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스포츠한의학회에서는 ‘스포츠손상치료 야구편’의 발간을 앞두고 있고 배구, 야구에 이어서 육상 등이 이후 발간될 계획으로 안다. 앞으로도 국내외의 다양한 스포츠 현장에서 임상술기로서 빛을 발하는 한의학이 되기를 고대한다.

박지훈/ 안산 동인당한의원장, 스포츠한의학회 학술위원

(덴마크 팀닥터와 함께.. )